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엥겔스 (문단 편집) === 런던으로 이사 === 1869년에는 20년 동안 일해온 에르멘 앤 엥겔스 사를 은퇴하고, 동업자에게 지분을 넘기는 조건으로 상당한 액수의 현금과 주식을 받아 마르크스와 자신의 노후 생계비로 사용하였다. 자유의 몸이 된 엥겔스는 1870년 여름 친구 마르크스가 사는 런던으로 이주하였다. 새로 이사온 집은 마르크스의 집과 10분 거리였다. "자본론 말마따나 프롤레타리아트를 착취하여 얻은 자본"을 친구 마르크스의 생계비로 보태주는 모순된 상황은 그가 에르맨 앤 엥겔스 사를 퇴직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. 그가 은퇴한 시점에서 런던은 금융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고,[*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런던은 "세계의 중앙은행"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, 런던의 자본가들은 페루의 철도에서부터 포르투갈 리본의 시가 전차, 호주의 뉴 사우스 웨일스의 광산, 인도의 차 농장에까지 투자를 하고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. 이를 두고 [[에릭 홉스봄]]은 1870년대 이후 1차대전 사이의 영국 경제를 두고 "영국은 경쟁력 있는 경제가 아닌 기생적 경제가 되었다."고 평가한 바 있다.] 엥겔스 역시 마르크스주의에서 악당으로 규정하는 금리생활자가 된 것이다.[* 여담으로 엥겔스는 지인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에서 "난 주식 거래에 도움을 받기 위해 사회주의 언론을 참고할 만큼 그렇게 순진하지 않네. 그런 사람이 있다면 보유 자산이 순식간에 반 토막 나고 말거야!"라고 쓴 적도 있었다.] 런던으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엥겔스는 제1[[인터내셔널]] 총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. 처음에는 인터내셔널 벨기에 담당 연락서기로 시작하여 이후 이탈리아, 스페인, 포르투갈, 덴마크까지 담당하면서 엥겔스는 사실상 전 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조율하는 책임을 맡았다. 엥겔스는 에르멘 앤 엥겔스 사에서 일할 때와 마찬가지로 인터내셔널 내에서도 매우 좋은 평판을 얻었는데, 근면성실한 것은 물론 [[폴리글롯]]이라 유럽 각지에서 자신에게 배달되는 편지의 주요 내용들을 모두 정확하게 분류하고 기억하는 것으로 유명했다. 엥겔스는 당시 영국 내에서 구사자가 극히 드물었던 [[러시아어]]와 [[포르투갈어]], [[루마니아어]]는 물론이고 프랑스의 프로방스어, 스페인의 [[카탈루냐어]] 같은 지역어도 능숙하게 구사했고, 현지 공산주의자들이 현지어로 보낸 편지에 그 해당국 현지어로 답신을 보내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. 물론 엥겔스 역시 제1인터내셔널 내에서 다른 혁명가, 사상가들과 발언권 싸움을 벌이는 일이 많았다.[* 인터내셔널에 가입하면서 갑자기 성격이 공격적으로 변한 게 아니라, 1844년부터 1848년 사이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할 당시 다른 혁명가들에게 속임수를 썼다가 쫓겨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.] 인터내셔널 내에서 종종 마르크스의 불독이라는 별명으로 조롱받기도 했으며 특히 [[미하일 바쿠닌]]과의 대립이 잘 알려져있다. 하지만 권력 싸움을 벌일 때 종종 더티한 방법을 사용했던 것과는 별개로 인터내셔널 내에서 개인적인 평판이 매우 좋았던 사람이기도 했다. (제1인터내셔널이 해체된 이후 일이긴 하지만) 한번은 1878년 프로이센의 [[비스마르크]]가 반사회주의법을 만들어 독일 내 사회주의 운동가들 상당수를 투옥시키거나 직장에서 해고시킨 적이 있는데 이 당시 엥겔스가 직접 나서서 체포된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정적이건 정적 아니건 가리지 않고 해당인들 가족들에게 밥을 굶지 말라고 돈을 꾸준히 부쳐주기도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